
경기장 안의 풍경은 늘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우스를 쥔 손, 헤드셋을 쓴 표정, 화면 속 스코어보드에 몰입한 눈빛. e스포츠를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이미지는 오랫동안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1~2년 사이 유통업계와 패션·뷰티 브랜드들이 e스포츠 구단과 손을 잡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정작 지갑을 여는 손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명문 구단이 스스로 인정한 이 반전의 수치를 따라가다 보면, e스포츠라는 산업이 지금 누구를 향해 다시 설계되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미리보기
- T1 사업개발팀장이 밝힌 '구매력 기준 여성 7 대 3'이라는 수치가, 게이머 중심으로 여겨졌던 e스포츠 소비층에 대한 통념을 뒤집습니다.
- 에이블리는 유니폼을 넘어 마스카라·파우더 등 뷰티 라인까지, 무신사는 유니폼에서 향수·디퓨저까지 협업 영역을 넓히며 팬덤을 일상 소비자로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 신세계백화점의 대전 팝업 사례는 e스포츠 팬덤이 침체된 지방 오프라인 유통에 실질적인 집객 효과를 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 형지엘리트, 뉴트리디데이 등 패션·뷰티를 넘어 식음료 업계까지 뛰어들며, 협업은 특정 구단만의 이야기가 아닌 산업 전반의 흐름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 LCK 시청률 42% 성장, 국내 산업 규모 2년간 20.5% 증가 등의 수치가 이 협업 러시의 배경을 뒷받침합니다.
이미지출처: 연합뉴스
구단이 목격한, 예상 밖의 지갑
지난해 말 열린 '2025 e스포츠 토크 콘서트'에서 T1의 박형준 사업개발팀장이 내놓은 발언은 그래서 더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는 T1을 기준으로 구매력을 가진 팬층은 7 대 3으로 여성이 더 많다고 밝히며, 여성 팬을 겨냥한 제품 기획이 이제 구단 운영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는 인구는 여전히 남성 비중이 높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굿즈에 돈을 쓰고 팝업 매장 앞에 줄을 서는 이들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간극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닙니다. 최근 1~2년 사이 국내 유통업계와 패션·뷰티 브랜드들이 e스포츠 구단과 손을 잡는 속도를 보면, 이 반전이 이미 시장의 상수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롤 국제 대회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진 명문 구단조차 인정한 이 역전 현상을 따라가다 보면, e스포츠라는 산업이 지금 누구를 향해 다시 설계되고 있는지가 보입니다.

이미지출처: 에이블리
마스카라를 산 사람은 게이머가 아니었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입니다. 에이블리를 운영하는 에이블리코퍼레이션은 2026년 1월부터 T1의 리드 파트너로 공식 후원에 나서며, 단순한 로고 노출을 넘어선 협업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여성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와 남성 패션 플랫폼 4910은 T1과 공동 기획한 굿즈 컬렉션 '모먼트 오브 티원'을 선보이고, 2026년 4월 20일부터 30일까지 11일간 프로모션을 진행했습니다.

이미지출처: 에이블리
여기까지는 스포츠 마케팅의 익숙한 문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이블리가 그다음으로 내놓은 카드는 결이 달랐습니다. 마스카라, 파우더, 뷰티 디바이스로 구성된 'T1 뷰티' 라인이었습니다. 유니폼이나 응원 도구가 아니라 화장품이 구단 굿즈로 등장한 셈입니다. 이는 e스포츠 소비자의 실루엣이 더 이상 '스크린 앞의 게이머' 한 종류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뷰티 아이템을 통해 고객 접점을 넓히려는 이 전략은, 팬덤을 게임 팬으로 한정하지 않고 일상 소비자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미지출처: 무신사
무신사가 유니폼을 놓지 않는 이유
패션업계의 움직임은 에이블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무신사는 2026년 젠지 e스포츠의 공식 후원사로 참여해, 젠지 소속 프로 선수들이 실제 경기에서 착용하는 공식 유니폼을 직접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한정 상품 발매 서비스 '무신사 드롭'을 통해 2026 시즌 젠지 공식 저지와 재킷, 2026년 5월 서머 유니폼이 차례로 출시됐고, 오는 2026년 9월에는 관련 의류 단독 라인이 출시될 예정입니다.
이미지출처: 무신사
무신사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향수와 디퓨저 등 뷰티 영역까지 협업 생태계를 넓히려 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유니폼 판매만으로는 후원 비용을 상쇄하기 어렵다는 계산이 깔려 있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는 e스포츠 팬덤이 옷장 밖으로, 화장대 안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젠지 시그니처를 담은 유니폼 컬렉션에는 통기성을 갖춘 폴리에스터 소재가 적용됐는데, 이는 실제 착용 목적의 스포츠웨어로도 기능하도록 설계됐다는 점에서 순수 기념품과는 다른 포지셔닝을 보여줍니다.
이미지출처: 뉴스아이이에스
대전에 팝업이 뜬 진짜 이유
유통업계의 셈법은 더 노골적입니다. 신세계백화점은 대전 유성구 대전신세계 아트앤사이언스에서 젠지 e스포츠와 손잡고 '젠랑 X 꿈돌이 콜라보레이션 팝업'을 운영했습니다. 이 팝업은 우연히 기획된 것이 아니라, 같은 시기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리그 오브 레전드 국제대회 2026 MSI' 일정에 맞춰 정교하게 설계된 결과였습니다. 대회 기간 국내외 e스포츠 팬 약 8만 명이 도보 10분 거리의 행사장을 찾을 것으로 예상됐고, 백화점은 이 유동 인구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지방 상권의 오프라인 유통 채널이 침체를 겪는 상황에서, e스포츠 팬덤은 확실한 방문 동기를 제공하는 몇 안 되는 콘텐츠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젠지 구단 마스코트 '젠랑'과 대전광역시 상징 캐릭터 '꿈돌이'를 결합한 한정판 상품, 오피셜 플레이어 재킷과 유니폼 등 총 26종의 굿즈가 이 팝업에서 선보였습니다. 백화점 입장에서 e스포츠는 이제 게임 산업의 부산물이 아니라, 집객력을 갖춘 독립적인 콘텐츠 자산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이미지출처: 네이트
e스포츠판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
이 흐름이 T1과 젠지 두 구단만의 이야기라면 우연으로 넘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종목, 다른 브랜드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형지엘리트의 스포츠 컬처 브랜드 윌비플레이는 한화생명 e스포츠(HLE)와 손잡고 굿즈 포트폴리오를 확장했고, 건강식품 기업 뉴트리디데이는 2026년 4월 e스포츠 구단 디플러스 기아와 파트너십을 체결해 협업 상품을 출시했습니다.
이미지출처: 이넷뉴스
패션과 뷰티에 이어 식음료 업계까지 e스포츠 마케팅에 뛰어드는 모습은, 이 산업이 이제 단일 카테고리의 팬덤 비즈니스가 아니라 소비재 전반을 아우르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e스포츠에 관심을 보이는 1020 젊은층이 많고 여성 팬덤도 두텁게 형성되어 있어, 패션·식품·뷰티 업계와 게임 구단의 협업이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두 개의 키워드는 '젊음'과 '여성'이며, 이 조합이 유통업계가 가장 확보하고 싶어하는 소비층과 정확히 겹친다는 점이 협업 확산의 배경으로 꼽힙니다.
이미지출처: 라이엇게임즈
숫자가 말해주는 것
이 모든 협업이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배경에는 e스포츠 산업 자체의 뚜렷한 성장 곡선이 있습니다. 라이엇게임즈에 따르면, 2025년 통합 시즌 방식으로 개편된 LCK의 첫해 평균 분당 시청자 수는 63만 4천 명으로, 전년 대비 42% 성장하며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습니다. 시청 지표의 급격한 상승은 광고주와 유통업계가 이 시장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직접적인 근거가 됩니다.
산업 규모의 성장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e스포츠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e스포츠 산업 규모는 2022년 2,383억 원에서 2023년 2,569억 5천만 원, 2024년 약 2,872억 원으로 꾸준히 늘었으며, 최근 2년간 20.5% 증가한 셈입니다. 컨설팅업체 딜로이트는 2025년 기준 글로벌 e스포츠 시장 규모를 약 81억 달러(약 12조 4,500억 원) 수준으로 추산했습니다.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e스포츠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대중적 관심이 한층 확대된 흐름도 이런 성장세를 뒷받침하는 요인으로 꼽힙니다.

이미지출처: 연합뉴스
왜 하필 여성인가
숫자는 성장을 설명해 주지만, '왜 여성인가'라는 질문에는 완전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이 지점부터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분석적 해석의 영역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업계 관계자들이 공통으로 짚는 지점은 있습니다. e스포츠 팬덤이 아이돌 팬덤과 유사한 소비 문법을 공유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선수의 유니폼을 소장하고, 굿즈를 통해 소속감을 표현하고, 팝업 매장에서 같은 팬들과 경험을 공유하는 행위는 케이팝 팬덤에서 이미 오랫동안 관찰돼 온 소비 패턴과 겹칩니다.
여성 팬덤 연구에서는 팬 활동이 단순한 소비를 넘어 자기표현과 정체성 형성의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분석이 꾸준히 제기돼 왔습니다. e스포츠 굿즈 소비 역시 같은 틀에서 설명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지만, 이것이 학술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인과관계라기보다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해석틀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확실한 것은, 브랜드들이 더 이상 'e스포츠 소비자는 남성'이라는 전제를 깔고 상품을 기획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Editor's Note
화려한 협업 사례들 이면에는 냉정하게 짚어야 할 지점도 남아 있습니다. e스포츠 산업의 수익 구조는 여전히 스폰서십 의존도가 높은 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구단 성적이 저조해지거나 팬덤이 축소될 경우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리스크로 지목돼 왔습니다. 지금의 여성 팬덤·유통업계 협업 열풍 역시, 팬덤의 열기가 식거나 경기 침체로 기업의 마케팅 예산이 축소될 경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변수입니다.
또한 현재 공개된 수치들은 대부분 특정 구단, 특정 시점의 사례에 근거한 것이어서, e스포츠 팬덤 전체로 일반화하기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T1의 7 대 3이라는 비율이 다른 구단이나 다른 종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단정할 근거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패션, 뷰티, 식음료 업계가 잇따라 e스포츠 구단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이 시장이 게이머만을 위한 곳이라는 낡은 전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출처
- 네이트 뉴스, "e스포츠 협업 늘리는 유통업계…구매력 갖춘 여성팬덤 효과 톡톡" (2026.06.28)
- 이비엔(EBN)뉴스센터, "젠지·여성팬 잡아라...유통업계, e스포츠와 협력체계 구축 '잰걸음'" (2026.07.14)
- 한국콘텐츠진흥원, e스포츠 실태조사
- 딜로이트, 글로벌 e스포츠 시장 규모 조사 (2025년 기준)
- 라이엇게임즈 코리아, LCK 2025 시즌 시청 지표 발표 자료
- 방송통신위원회 관련 e스포츠 산업 통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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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안의 풍경은 늘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우스를 쥔 손, 헤드셋을 쓴 표정, 화면 속 스코어보드에 몰입한 눈빛. e스포츠를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이미지는 오랫동안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1~2년 사이 유통업계와 패션·뷰티 브랜드들이 e스포츠 구단과 손을 잡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정작 지갑을 여는 손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명문 구단이 스스로 인정한 이 반전의 수치를 따라가다 보면, e스포츠라는 산업이 지금 누구를 향해 다시 설계되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미리보기
구단이 목격한, 예상 밖의 지갑
지난해 말 열린 '2025 e스포츠 토크 콘서트'에서 T1의 박형준 사업개발팀장이 내놓은 발언은 그래서 더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는 T1을 기준으로 구매력을 가진 팬층은 7 대 3으로 여성이 더 많다고 밝히며, 여성 팬을 겨냥한 제품 기획이 이제 구단 운영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는 인구는 여전히 남성 비중이 높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굿즈에 돈을 쓰고 팝업 매장 앞에 줄을 서는 이들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간극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닙니다. 최근 1~2년 사이 국내 유통업계와 패션·뷰티 브랜드들이 e스포츠 구단과 손을 잡는 속도를 보면, 이 반전이 이미 시장의 상수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롤 국제 대회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진 명문 구단조차 인정한 이 역전 현상을 따라가다 보면, e스포츠라는 산업이 지금 누구를 향해 다시 설계되고 있는지가 보입니다.
이미지출처: 에이블리
마스카라를 산 사람은 게이머가 아니었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입니다. 에이블리를 운영하는 에이블리코퍼레이션은 2026년 1월부터 T1의 리드 파트너로 공식 후원에 나서며, 단순한 로고 노출을 넘어선 협업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여성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와 남성 패션 플랫폼 4910은 T1과 공동 기획한 굿즈 컬렉션 '모먼트 오브 티원'을 선보이고, 2026년 4월 20일부터 30일까지 11일간 프로모션을 진행했습니다.
이미지출처: 에이블리
여기까지는 스포츠 마케팅의 익숙한 문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이블리가 그다음으로 내놓은 카드는 결이 달랐습니다. 마스카라, 파우더, 뷰티 디바이스로 구성된 'T1 뷰티' 라인이었습니다. 유니폼이나 응원 도구가 아니라 화장품이 구단 굿즈로 등장한 셈입니다. 이는 e스포츠 소비자의 실루엣이 더 이상 '스크린 앞의 게이머' 한 종류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뷰티 아이템을 통해 고객 접점을 넓히려는 이 전략은, 팬덤을 게임 팬으로 한정하지 않고 일상 소비자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무신사가 유니폼을 놓지 않는 이유
패션업계의 움직임은 에이블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무신사는 2026년 젠지 e스포츠의 공식 후원사로 참여해, 젠지 소속 프로 선수들이 실제 경기에서 착용하는 공식 유니폼을 직접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한정 상품 발매 서비스 '무신사 드롭'을 통해 2026 시즌 젠지 공식 저지와 재킷, 2026년 5월 서머 유니폼이 차례로 출시됐고, 오는 2026년 9월에는 관련 의류 단독 라인이 출시될 예정입니다.
무신사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향수와 디퓨저 등 뷰티 영역까지 협업 생태계를 넓히려 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유니폼 판매만으로는 후원 비용을 상쇄하기 어렵다는 계산이 깔려 있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는 e스포츠 팬덤이 옷장 밖으로, 화장대 안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젠지 시그니처를 담은 유니폼 컬렉션에는 통기성을 갖춘 폴리에스터 소재가 적용됐는데, 이는 실제 착용 목적의 스포츠웨어로도 기능하도록 설계됐다는 점에서 순수 기념품과는 다른 포지셔닝을 보여줍니다.
대전에 팝업이 뜬 진짜 이유
유통업계의 셈법은 더 노골적입니다. 신세계백화점은 대전 유성구 대전신세계 아트앤사이언스에서 젠지 e스포츠와 손잡고 '젠랑 X 꿈돌이 콜라보레이션 팝업'을 운영했습니다. 이 팝업은 우연히 기획된 것이 아니라, 같은 시기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리그 오브 레전드 국제대회 2026 MSI' 일정에 맞춰 정교하게 설계된 결과였습니다. 대회 기간 국내외 e스포츠 팬 약 8만 명이 도보 10분 거리의 행사장을 찾을 것으로 예상됐고, 백화점은 이 유동 인구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지방 상권의 오프라인 유통 채널이 침체를 겪는 상황에서, e스포츠 팬덤은 확실한 방문 동기를 제공하는 몇 안 되는 콘텐츠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젠지 구단 마스코트 '젠랑'과 대전광역시 상징 캐릭터 '꿈돌이'를 결합한 한정판 상품, 오피셜 플레이어 재킷과 유니폼 등 총 26종의 굿즈가 이 팝업에서 선보였습니다. 백화점 입장에서 e스포츠는 이제 게임 산업의 부산물이 아니라, 집객력을 갖춘 독립적인 콘텐츠 자산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e스포츠판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
이 흐름이 T1과 젠지 두 구단만의 이야기라면 우연으로 넘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종목, 다른 브랜드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형지엘리트의 스포츠 컬처 브랜드 윌비플레이는 한화생명 e스포츠(HLE)와 손잡고 굿즈 포트폴리오를 확장했고, 건강식품 기업 뉴트리디데이는 2026년 4월 e스포츠 구단 디플러스 기아와 파트너십을 체결해 협업 상품을 출시했습니다.
패션과 뷰티에 이어 식음료 업계까지 e스포츠 마케팅에 뛰어드는 모습은, 이 산업이 이제 단일 카테고리의 팬덤 비즈니스가 아니라 소비재 전반을 아우르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e스포츠에 관심을 보이는 1020 젊은층이 많고 여성 팬덤도 두텁게 형성되어 있어, 패션·식품·뷰티 업계와 게임 구단의 협업이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두 개의 키워드는 '젊음'과 '여성'이며, 이 조합이 유통업계가 가장 확보하고 싶어하는 소비층과 정확히 겹친다는 점이 협업 확산의 배경으로 꼽힙니다.
숫자가 말해주는 것
이 모든 협업이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배경에는 e스포츠 산업 자체의 뚜렷한 성장 곡선이 있습니다. 라이엇게임즈에 따르면, 2025년 통합 시즌 방식으로 개편된 LCK의 첫해 평균 분당 시청자 수는 63만 4천 명으로, 전년 대비 42% 성장하며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습니다. 시청 지표의 급격한 상승은 광고주와 유통업계가 이 시장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직접적인 근거가 됩니다.
산업 규모의 성장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e스포츠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e스포츠 산업 규모는 2022년 2,383억 원에서 2023년 2,569억 5천만 원, 2024년 약 2,872억 원으로 꾸준히 늘었으며, 최근 2년간 20.5% 증가한 셈입니다. 컨설팅업체 딜로이트는 2025년 기준 글로벌 e스포츠 시장 규모를 약 81억 달러(약 12조 4,500억 원) 수준으로 추산했습니다.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e스포츠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대중적 관심이 한층 확대된 흐름도 이런 성장세를 뒷받침하는 요인으로 꼽힙니다.
이미지출처: 연합뉴스
왜 하필 여성인가
숫자는 성장을 설명해 주지만, '왜 여성인가'라는 질문에는 완전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이 지점부터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분석적 해석의 영역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업계 관계자들이 공통으로 짚는 지점은 있습니다. e스포츠 팬덤이 아이돌 팬덤과 유사한 소비 문법을 공유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선수의 유니폼을 소장하고, 굿즈를 통해 소속감을 표현하고, 팝업 매장에서 같은 팬들과 경험을 공유하는 행위는 케이팝 팬덤에서 이미 오랫동안 관찰돼 온 소비 패턴과 겹칩니다.
여성 팬덤 연구에서는 팬 활동이 단순한 소비를 넘어 자기표현과 정체성 형성의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분석이 꾸준히 제기돼 왔습니다. e스포츠 굿즈 소비 역시 같은 틀에서 설명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지만, 이것이 학술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인과관계라기보다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해석틀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확실한 것은, 브랜드들이 더 이상 'e스포츠 소비자는 남성'이라는 전제를 깔고 상품을 기획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Editor's Note
화려한 협업 사례들 이면에는 냉정하게 짚어야 할 지점도 남아 있습니다. e스포츠 산업의 수익 구조는 여전히 스폰서십 의존도가 높은 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구단 성적이 저조해지거나 팬덤이 축소될 경우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리스크로 지목돼 왔습니다. 지금의 여성 팬덤·유통업계 협업 열풍 역시, 팬덤의 열기가 식거나 경기 침체로 기업의 마케팅 예산이 축소될 경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변수입니다.
또한 현재 공개된 수치들은 대부분 특정 구단, 특정 시점의 사례에 근거한 것이어서, e스포츠 팬덤 전체로 일반화하기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T1의 7 대 3이라는 비율이 다른 구단이나 다른 종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단정할 근거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패션, 뷰티, 식음료 업계가 잇따라 e스포츠 구단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이 시장이 게이머만을 위한 곳이라는 낡은 전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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