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출처: sotheby's
지난 7월 3일, 경매업체 소더비가 낯선 물건 하나를 카탈로그에 올렸습니다. 새것이나 다름없는 검은색 가죽 재킷, 브랜드는 톰 포드. 그 자체로는 백화점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옷입니다. 그런데 이 재킷의 예상 낙찰가는 최대 6만 달러, 원화로 9000만원에 이릅니다. 엔비디아의 최신 인공지능 칩 블랙웰 한 대 값과 맞먹는 수준입니다. 뉴욕 소더비 전시장에는 이 재킷 한 벌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미지출처: sotheby's
이 재킷의 주인은 엔비디아 CEO 젠슨 황입니다. 2023년 10월 18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혼하이테크데이 행사에서 그가 실제로 착용했던 제품이며, 친필 서명까지 남아 있습니다. 스포츠 기념품 인증업체 PSA가 사진 판독으로 당시 착용 제품과 동일함을 확인했고, 서명은 별도 인증업체 JSA가 진품 판정을 내렸습니다. 경매는 이달 17일까지 진행되며, 수익금 전액은 벤처펀드 롱 저니 벤처스의 자선 프로젝트를 통해 비영리단체 에지 인스티튜트에 기부될 예정입니다. 참고로 이번 경매는 7일에 시작해 아직 최종 낙찰가가 공개되지 않은 상태이며, 현재 언급되는 6000만 원에서 9000만 원은 어디까지나 사전 추정가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옷 한 벌에 이런 값이 매겨지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신기한 건 가격이 아닙니다. 이 재킷이 특별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아무도 엔비디아의 실적이나 반도체 기술을 끌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사려는 건 옷감이 아니라, 그 옷이 오랫동안 반복되며 쌓아온 의미 쪽입니다.
동일한 브랜드의 신제품 재킷은 백화점에서 1만 달러 안팎이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젠슨 황이 입었다는 사실만으로 가치가 네다섯 배 뛰어오릅니다. 재봉이나 원단이 달라진 게 아닙니다. 그가 그 재킷을 입고 무대에 오른 순간들, 그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이야기가 값을 만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궁금해지는 건 하나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옷 한 벌이 이런 서사를 갖게 되는 걸까요.
이미지출처: Investopedia
정장 대신 가죽을 고른 남자
젠슨 황은 신제품 발표회든 해외 출장이든, 심지어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 일상적인 자리에서도 같은 스타일의 검은 가죽 재킷을 입습니다. 처음엔 그저 개인 취향처럼 보였을 이 습관은, 엔비디아가 인공지능 인프라 시장의 중심 기업으로 떠오르면서 전혀 다른 무게를 갖게 됐습니다. 소더비는 이번 출품작을 소개하며 "다른 누구보다 먼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만큼 용감한 사람들이 미래를 만든다는 믿음의 유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다른 설명에서는 이 재킷을 "최초 신봉자의 제복"이라 부르며, 진정성과 독창성, 끈기와 용기를 구현하는 그의 리더십 스타일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옷을 설명하는 문장에 브랜드나 소재 이야기는 한 줄도 없습니다. 온통 리더십과 비전에 관한 말뿐입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경매가 엔비디아나 젠슨 황 본인이 주도한 행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벤처펀드 롱 저니 벤처스가 기획한 자선 경매이고, 젠슨 황은 그저 재킷을 기증한 입장입니다. 즉 이 옷의 상품성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시장과 대중이 그의 반복된 이미지를 보고 알아서 부여한 값입니다.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까지 브랜드가 넘어갔다는 뜻이고, 이는 반복된 이미지가 얼마나 강력한 자산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이기도 합니다.
기술 업계에서는 이 가죽 재킷을 이미 오래전부터 다른 상징 하나와 나란히 놓아 왔습니다. 고 스티브 잡스 애플 공동창업자의 검은색 터틀넥입니다. 재킷과 터틀넥은 소재도 브랜드도 다르지만, 두 사람이 그것을 입은 방식은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매번 같은 옷, 매번 같은 자리에서. 그리고 이 반복이야말로 두 아이템을 단순한 패션 아이템에서 산업 전체가 알아보는 기호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잡스가 만들려다 실패한 유니폼
사실 잡스의 터틀넥은 처음부터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는 1980년대 그가 소니를 방문하면서 시작됩니다. 잡스는 소니 회장 아키오 모리타에게 왜 공장 직원들이 전부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모리타는 전후 일본에서 사람들이 입을 옷이 부족해 회사가 옷을 나눠주기 시작한 것이 유래였다고 설명했고, 그 유니폼은 시간이 흐르며 소니만의 스타일이 되어 직원들을 하나로 묶는 상징이 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유니폼을 디자인한 사람이 바로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였습니다. 립스톱 나일론으로 만든 재킷이었는데, 소매를 지퍼로 분리하면 조끼로도 입을 수 있는 실용적인 구조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미지출처: SUPERELLIPSE.NET (이세이 미야케가 디자인한 소니의 유니폼)
잡스는 애플에도 같은 방식의 결속력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미야케에게 애플 직원용 조끼를 의뢰했고, 시제품을 들고 돌아와 전 직원 앞에서 발표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잡스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무대에서 야유를 받으며 쫓겨났다"고 할 정도로, 직원들은 통일된 복장이라는 발상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조직 전체에 하나의 이미지를 강제로 씌우려는 시도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습니다.
회사 차원의 유니폼은 무산됐지만, 그 과정에서 잡스와 미야케 사이에는 우정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잡스는 조직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유니폼을 갖기로 합니다. 그는 미야케가 만든 검은색 터틀넥이 마음에 든다며 넉넉히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미야케는 그를 위해 백 벌 가까이 되는 터틀넥을 만들었습니다.

잡스는 훗날 자서전 작가 월터 아이작슨에게 그 터틀넥들을 옷장에 가지런히 쌓아 보여주며 "평생 입을 만큼 충분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 리바이스 501 청바지를 더한 조합이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수한 옷차림이 됐습니다. 잡스는 이 옷차림이 옷을 고르는 수고를 덜어준다고 말하곤 했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각인시키는 방법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 직원에게 입히려다 실패한 유니폼이 결국 한 사람만을 위한 상징으로 남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조직의 결속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지만, 한 사람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시간이 지나며 저절로 브랜드가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이폰 발표부터 아이클라우드 공개까지, 잡스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카메라에 잡힌 옷차림은 한결같았습니다. 청중이 그의 프레젠테이션 내용보다 먼저 그의 실루엣을 알아보게 된 것도 이 반복 덕분이었습니다. 애플 제품이 군더더기를 덜어낸 미니멀한 디자인을 추구했던 것처럼, 그의 옷차림 역시 선택지를 덜어낸 결과물이었다는 점도 우연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미지출처: 중앙일보
회색 티셔츠가 무너진 순간
같은 원리를 정반대 방향에서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메타 CEO 마크 저커버그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회색 반소매 티셔츠와 후드티만 고집한 인물로 유명했습니다. 2016년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하며 자신의 옷장 사진을 공개했을 때, 사진 속에는 똑같은 회색 티셔츠 수십 벌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 게시물에는 이틀 만에 120만 개의 '좋아요'와 7만 건이 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왜 매일 같은 옷을 입느냐는 질문에 그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고민 외에 다른 결정은 최소화하고 싶다"는 취지로 답했습니다. 옷을 고르는 데 쓸 에너지를 아껴 더 중요한 문제에 쓰겠다는 논리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검소해 보이는 티셔츠가 사실은 브루넬로 쿠치넬리라는 최고급 브랜드의 맞춤 제작 제품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박함조차 정교하게 설계된 이미지였던 셈입니다. 대중은 이를 두고 "54조원 자산가의 검소한 단벌 패션"이라 추어올렸지만, 정작 옷값만 놓고 보면 결코 저렴한 선택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이미지출처: 모바일한경
그런데 이 단벌 신사가 최근 들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하고 있습니다. 짧게 깎던 머리를 자연스럽게 길렀고, 회색 티셔츠는 흰색과 검은색, 파란색 등으로 다양해졌습니다. 인도 재벌가 결혼식에는 호랑이 무늬가 수놓인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타났고, 메타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에서는 고대 로마 황제들이 최고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할 때 썼던 문구를 자신의 애칭 '주크'로 바꿔 새긴 티셔츠를 직접 제작해 입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두고 "너드의 전형이었던 그가 부드러워졌다"고 평가했고, 회색 티셔츠에서 벗어난 것이 오히려 그가 더 유연한 리더로 보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습니다.
업계에서는 이 변화를 두고 저커버그가 '컴퓨터만 아는 괴짜' 이미지에서 벗어나 더 주체적이고 외향적인 인물로 스스로를 다시 포지셔닝하려는 시도로 해석합니다. 회색 티셔츠가 그의 것일 때는 검소함과 실용주의의 상징이었지만, 그 옷을 벗어던지는 행위 자체가 이번에는 또 다른 메시지, 즉 변화와 유연함의 신호가 된 것입니다. 같은 사람의 옷이 무엇을 상징하느냐는 결국 그 옷을 얼마나 오래, 얼마나 한결같이 반복했는가에 달려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반복이 길었던 만큼, 그것을 깨는 사건도 그만큼 크게 읽힙니다.
이미지출처: 조선일보
반복이 자산이 되는 순간
세 사람의 옷차림에는 공통된 계산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은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면 그것을 실제보다 더 신뢰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케팅에서는 이를 브랜드 자산이라 부릅니다. 로고나 색상, 슬로건을 수십 년간 바꾸지 않는 기업들이 지키려는 것도 결국 이 반복의 힘입니다. 다만 기업은 이 작업을 조직 전체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수행합니다. 개인이 같은 옷을 반복해서 입는 것만으로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 흥미롭습니다. 로고를 새로 디자인하고 광고를 대량으로 집행하는 대신,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서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하나의 실루엣을 새겨 넣은 셈입니다.
젠슨 황의 재킷이 경매 시장에서 값어치를 인정받은 것은 이 논리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옷감이나 바느질이 달라진 게 아니라, 그 옷에 누적된 서사가 값을 만든 것입니다. 잡스의 터틀넥 역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판매량이 크게 늘어난 적이 있습니다. 옷 자체가 아니라 그 옷이 대변하던 인물과 시대가 팔린 셈입니다. 두 사례 모두 옷이 실제로 거래되는 시점은 공통적으로 그 인물이 무대에서 사라진 뒤였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반복이 오래될수록, 그리고 그 반복의 주인공이 더 이상 새로운 이미지를 덧붙일 수 없게 될수록, 남아 있는 상징의 값은 더 또렷해집니다.
물론 이 전략에는 위험도 따릅니다. 한번 각인된 이미지는 바꾸기가 쉽지 않고, 바꾸는 순간 그 자체가 또 다른 메시지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저커버그의 변신이 화제가 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가 원래 무명의 인물이었다면 옷차림을 바꾼 일이 뉴스가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오랜 반복이 만들어낸 인식이 있었기에, 그 인식을 깨는 행위조차 하나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그니처 룩은 한번 완성되고 나면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대중의 것이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지점은, 이 반복이 대체 언제부터 자산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젠슨 황이 처음 가죽 재킷을 입기 시작했을 때, 혹은 잡스가 처음 검은 터틀넥을 걸쳤을 때, 그 순간에는 누구도 이것이 훗날 경매장의 물건이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반복은 처음에는 그저 습관으로 보이다가, 그 사람의 성취가 쌓이고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시점과 맞물리면서 비로소 상징으로 굳어집니다.
다시 말해 시그니처 룩 자체가 성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의 반복된 습관이 뒤늦게 시그니처 룩이라는 이름을 얻는다는 쪽이 사실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의 옷차림을 그저 따라 한다고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옷은 반복의 결과물이지, 반복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CEO들이 매일 같은 옷을 고르는 이유는 게으름도, 단순한 취향도 아닙니다.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지 않는 대신, 무엇으로 기억될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계산해 온 것에 가깝습니다.
Editor's Note
젠슨 황의 가죽 재킷이 경매에 오르며 다시 한번 확인된 사실은, 결국 옷이 사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옷을 증명한다는 점입니다. 재킷도, 터틀넥도, 회색 티셔츠도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것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특별해진 건 그것을 입은 사람이 시간과 반복을 들여 그 물건에 자신의 이야기를 새겨 넣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은 남습니다. 시그니처 룩이 온전히 개인의 취향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계산된 이미지 전략이었는지는 사실 당사자 외에는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저커버그의 사례처럼 '검소함'으로 읽히던 옷이 사실은 최고급 맞춤 제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소박함이라는 서사 자체가 흔들리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이 반복의 전략이 모두에게 똑같이 관대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도 짚어두고 싶습니다. 같은 무심함이라도 누가 보여주느냐에 따라 소탈함으로 읽히기도 하고, 아무 메시지도 없는 것으로 지나쳐지기도 합니다. 젠슨 황과 잡스의 사례가 흥미로운 만큼, 이 자산이 아무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쌓이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 두시면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젠슨 황 상징' 가죽 재킷, 경매 나온다", 2026.07.05, https://www.khan.co.kr/article/202607052016025
- 한국경제, "젠슨 황 가죽재킷 9000만원…블랙웰 가격 맞먹는다", 2026.07.04,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6070560917
- 이데일리, "젠슨 황이 입던 '검은 가죽재킷' 경매에…낙찰 예상 가격은?", 2026.07.04, https://edaily.co.kr/News/Read?mediaCodeNo=257&newsId=01246406645511240
- 파이낸셜뉴스, "젠슨 황 '가죽 재킷' 경매에…낙찰가 AI칩 값과 맞먹는 9000만원 예상", 2026.07.03, https://www.fnnews.com/news/202607041006311667
- NPR, "The story of Steve Jobs and Issey Miyake's friendship (and a nixed Apple uniform)", 2022.08.10, https://www.npr.org/2022/08/10/1116769827/the-story-of-steve-jobs-and-issey-miyakes-friendship-and-a-nixed-apple-uniform
- Forbes, "Here's The Real Story Of Issey Miyake And Steve Jobs' Iconic Turtleneck", 2022.08.10, https://www.forbes.com/sites/jenniferhicks/2022/08/10/heres-the-real-story-of-issey-miyake-and-steve-jobs-iconic-turtleneck/
- 매거진한경, "'시끄러운 럭셔리'로 일탈한 억만장자의 패션 철학,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2024.03.10, https://magazine.hankyung.com/business/article/202403059421b
- 한국일보, "'옷 고르는 에너지 아끼겠다'던 '너드' 저커버그는 왜 회색티를 벗었나", 2024.10.08,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00706140004245
- 한국일보, "저커버그는 되고, 메르켈은 안 되는 '단벌패션'의 정치학", 2016.01.29,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1290481552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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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3일, 경매업체 소더비가 낯선 물건 하나를 카탈로그에 올렸습니다. 새것이나 다름없는 검은색 가죽 재킷, 브랜드는 톰 포드. 그 자체로는 백화점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옷입니다. 그런데 이 재킷의 예상 낙찰가는 최대 6만 달러, 원화로 9000만원에 이릅니다. 엔비디아의 최신 인공지능 칩 블랙웰 한 대 값과 맞먹는 수준입니다. 뉴욕 소더비 전시장에는 이 재킷 한 벌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재킷의 주인은 엔비디아 CEO 젠슨 황입니다. 2023년 10월 18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혼하이테크데이 행사에서 그가 실제로 착용했던 제품이며, 친필 서명까지 남아 있습니다. 스포츠 기념품 인증업체 PSA가 사진 판독으로 당시 착용 제품과 동일함을 확인했고, 서명은 별도 인증업체 JSA가 진품 판정을 내렸습니다. 경매는 이달 17일까지 진행되며, 수익금 전액은 벤처펀드 롱 저니 벤처스의 자선 프로젝트를 통해 비영리단체 에지 인스티튜트에 기부될 예정입니다. 참고로 이번 경매는 7일에 시작해 아직 최종 낙찰가가 공개되지 않은 상태이며, 현재 언급되는 6000만 원에서 9000만 원은 어디까지나 사전 추정가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옷 한 벌에 이런 값이 매겨지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신기한 건 가격이 아닙니다. 이 재킷이 특별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아무도 엔비디아의 실적이나 반도체 기술을 끌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사려는 건 옷감이 아니라, 그 옷이 오랫동안 반복되며 쌓아온 의미 쪽입니다.
동일한 브랜드의 신제품 재킷은 백화점에서 1만 달러 안팎이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젠슨 황이 입었다는 사실만으로 가치가 네다섯 배 뛰어오릅니다. 재봉이나 원단이 달라진 게 아닙니다. 그가 그 재킷을 입고 무대에 오른 순간들, 그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이야기가 값을 만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궁금해지는 건 하나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옷 한 벌이 이런 서사를 갖게 되는 걸까요.
정장 대신 가죽을 고른 남자
젠슨 황은 신제품 발표회든 해외 출장이든, 심지어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 일상적인 자리에서도 같은 스타일의 검은 가죽 재킷을 입습니다. 처음엔 그저 개인 취향처럼 보였을 이 습관은, 엔비디아가 인공지능 인프라 시장의 중심 기업으로 떠오르면서 전혀 다른 무게를 갖게 됐습니다. 소더비는 이번 출품작을 소개하며 "다른 누구보다 먼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만큼 용감한 사람들이 미래를 만든다는 믿음의 유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다른 설명에서는 이 재킷을 "최초 신봉자의 제복"이라 부르며, 진정성과 독창성, 끈기와 용기를 구현하는 그의 리더십 스타일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옷을 설명하는 문장에 브랜드나 소재 이야기는 한 줄도 없습니다. 온통 리더십과 비전에 관한 말뿐입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경매가 엔비디아나 젠슨 황 본인이 주도한 행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벤처펀드 롱 저니 벤처스가 기획한 자선 경매이고, 젠슨 황은 그저 재킷을 기증한 입장입니다. 즉 이 옷의 상품성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시장과 대중이 그의 반복된 이미지를 보고 알아서 부여한 값입니다.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까지 브랜드가 넘어갔다는 뜻이고, 이는 반복된 이미지가 얼마나 강력한 자산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이기도 합니다.
기술 업계에서는 이 가죽 재킷을 이미 오래전부터 다른 상징 하나와 나란히 놓아 왔습니다. 고 스티브 잡스 애플 공동창업자의 검은색 터틀넥입니다. 재킷과 터틀넥은 소재도 브랜드도 다르지만, 두 사람이 그것을 입은 방식은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매번 같은 옷, 매번 같은 자리에서. 그리고 이 반복이야말로 두 아이템을 단순한 패션 아이템에서 산업 전체가 알아보는 기호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잡스가 만들려다 실패한 유니폼
사실 잡스의 터틀넥은 처음부터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는 1980년대 그가 소니를 방문하면서 시작됩니다. 잡스는 소니 회장 아키오 모리타에게 왜 공장 직원들이 전부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모리타는 전후 일본에서 사람들이 입을 옷이 부족해 회사가 옷을 나눠주기 시작한 것이 유래였다고 설명했고, 그 유니폼은 시간이 흐르며 소니만의 스타일이 되어 직원들을 하나로 묶는 상징이 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유니폼을 디자인한 사람이 바로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였습니다. 립스톱 나일론으로 만든 재킷이었는데, 소매를 지퍼로 분리하면 조끼로도 입을 수 있는 실용적인 구조였다고 전해집니다.
잡스는 애플에도 같은 방식의 결속력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미야케에게 애플 직원용 조끼를 의뢰했고, 시제품을 들고 돌아와 전 직원 앞에서 발표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잡스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무대에서 야유를 받으며 쫓겨났다"고 할 정도로, 직원들은 통일된 복장이라는 발상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조직 전체에 하나의 이미지를 강제로 씌우려는 시도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습니다.
회사 차원의 유니폼은 무산됐지만, 그 과정에서 잡스와 미야케 사이에는 우정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잡스는 조직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유니폼을 갖기로 합니다. 그는 미야케가 만든 검은색 터틀넥이 마음에 든다며 넉넉히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미야케는 그를 위해 백 벌 가까이 되는 터틀넥을 만들었습니다.
잡스는 훗날 자서전 작가 월터 아이작슨에게 그 터틀넥들을 옷장에 가지런히 쌓아 보여주며 "평생 입을 만큼 충분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 리바이스 501 청바지를 더한 조합이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수한 옷차림이 됐습니다. 잡스는 이 옷차림이 옷을 고르는 수고를 덜어준다고 말하곤 했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각인시키는 방법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 직원에게 입히려다 실패한 유니폼이 결국 한 사람만을 위한 상징으로 남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조직의 결속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지만, 한 사람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시간이 지나며 저절로 브랜드가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이폰 발표부터 아이클라우드 공개까지, 잡스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카메라에 잡힌 옷차림은 한결같았습니다. 청중이 그의 프레젠테이션 내용보다 먼저 그의 실루엣을 알아보게 된 것도 이 반복 덕분이었습니다. 애플 제품이 군더더기를 덜어낸 미니멀한 디자인을 추구했던 것처럼, 그의 옷차림 역시 선택지를 덜어낸 결과물이었다는 점도 우연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회색 티셔츠가 무너진 순간
같은 원리를 정반대 방향에서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메타 CEO 마크 저커버그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회색 반소매 티셔츠와 후드티만 고집한 인물로 유명했습니다. 2016년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하며 자신의 옷장 사진을 공개했을 때, 사진 속에는 똑같은 회색 티셔츠 수십 벌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 게시물에는 이틀 만에 120만 개의 '좋아요'와 7만 건이 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왜 매일 같은 옷을 입느냐는 질문에 그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고민 외에 다른 결정은 최소화하고 싶다"는 취지로 답했습니다. 옷을 고르는 데 쓸 에너지를 아껴 더 중요한 문제에 쓰겠다는 논리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검소해 보이는 티셔츠가 사실은 브루넬로 쿠치넬리라는 최고급 브랜드의 맞춤 제작 제품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박함조차 정교하게 설계된 이미지였던 셈입니다. 대중은 이를 두고 "54조원 자산가의 검소한 단벌 패션"이라 추어올렸지만, 정작 옷값만 놓고 보면 결코 저렴한 선택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 단벌 신사가 최근 들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하고 있습니다. 짧게 깎던 머리를 자연스럽게 길렀고, 회색 티셔츠는 흰색과 검은색, 파란색 등으로 다양해졌습니다. 인도 재벌가 결혼식에는 호랑이 무늬가 수놓인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타났고, 메타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에서는 고대 로마 황제들이 최고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할 때 썼던 문구를 자신의 애칭 '주크'로 바꿔 새긴 티셔츠를 직접 제작해 입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두고 "너드의 전형이었던 그가 부드러워졌다"고 평가했고, 회색 티셔츠에서 벗어난 것이 오히려 그가 더 유연한 리더로 보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습니다.
업계에서는 이 변화를 두고 저커버그가 '컴퓨터만 아는 괴짜' 이미지에서 벗어나 더 주체적이고 외향적인 인물로 스스로를 다시 포지셔닝하려는 시도로 해석합니다. 회색 티셔츠가 그의 것일 때는 검소함과 실용주의의 상징이었지만, 그 옷을 벗어던지는 행위 자체가 이번에는 또 다른 메시지, 즉 변화와 유연함의 신호가 된 것입니다. 같은 사람의 옷이 무엇을 상징하느냐는 결국 그 옷을 얼마나 오래, 얼마나 한결같이 반복했는가에 달려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반복이 길었던 만큼, 그것을 깨는 사건도 그만큼 크게 읽힙니다.
반복이 자산이 되는 순간
세 사람의 옷차림에는 공통된 계산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은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면 그것을 실제보다 더 신뢰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케팅에서는 이를 브랜드 자산이라 부릅니다. 로고나 색상, 슬로건을 수십 년간 바꾸지 않는 기업들이 지키려는 것도 결국 이 반복의 힘입니다. 다만 기업은 이 작업을 조직 전체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수행합니다. 개인이 같은 옷을 반복해서 입는 것만으로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 흥미롭습니다. 로고를 새로 디자인하고 광고를 대량으로 집행하는 대신,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서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하나의 실루엣을 새겨 넣은 셈입니다.
젠슨 황의 재킷이 경매 시장에서 값어치를 인정받은 것은 이 논리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옷감이나 바느질이 달라진 게 아니라, 그 옷에 누적된 서사가 값을 만든 것입니다. 잡스의 터틀넥 역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판매량이 크게 늘어난 적이 있습니다. 옷 자체가 아니라 그 옷이 대변하던 인물과 시대가 팔린 셈입니다. 두 사례 모두 옷이 실제로 거래되는 시점은 공통적으로 그 인물이 무대에서 사라진 뒤였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반복이 오래될수록, 그리고 그 반복의 주인공이 더 이상 새로운 이미지를 덧붙일 수 없게 될수록, 남아 있는 상징의 값은 더 또렷해집니다.
물론 이 전략에는 위험도 따릅니다. 한번 각인된 이미지는 바꾸기가 쉽지 않고, 바꾸는 순간 그 자체가 또 다른 메시지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저커버그의 변신이 화제가 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가 원래 무명의 인물이었다면 옷차림을 바꾼 일이 뉴스가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오랜 반복이 만들어낸 인식이 있었기에, 그 인식을 깨는 행위조차 하나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그니처 룩은 한번 완성되고 나면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대중의 것이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지점은, 이 반복이 대체 언제부터 자산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젠슨 황이 처음 가죽 재킷을 입기 시작했을 때, 혹은 잡스가 처음 검은 터틀넥을 걸쳤을 때, 그 순간에는 누구도 이것이 훗날 경매장의 물건이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반복은 처음에는 그저 습관으로 보이다가, 그 사람의 성취가 쌓이고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시점과 맞물리면서 비로소 상징으로 굳어집니다.
다시 말해 시그니처 룩 자체가 성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의 반복된 습관이 뒤늦게 시그니처 룩이라는 이름을 얻는다는 쪽이 사실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의 옷차림을 그저 따라 한다고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옷은 반복의 결과물이지, 반복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CEO들이 매일 같은 옷을 고르는 이유는 게으름도, 단순한 취향도 아닙니다.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지 않는 대신, 무엇으로 기억될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계산해 온 것에 가깝습니다.
Editor's Note
젠슨 황의 가죽 재킷이 경매에 오르며 다시 한번 확인된 사실은, 결국 옷이 사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옷을 증명한다는 점입니다. 재킷도, 터틀넥도, 회색 티셔츠도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것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특별해진 건 그것을 입은 사람이 시간과 반복을 들여 그 물건에 자신의 이야기를 새겨 넣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은 남습니다. 시그니처 룩이 온전히 개인의 취향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계산된 이미지 전략이었는지는 사실 당사자 외에는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저커버그의 사례처럼 '검소함'으로 읽히던 옷이 사실은 최고급 맞춤 제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소박함이라는 서사 자체가 흔들리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이 반복의 전략이 모두에게 똑같이 관대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도 짚어두고 싶습니다. 같은 무심함이라도 누가 보여주느냐에 따라 소탈함으로 읽히기도 하고, 아무 메시지도 없는 것으로 지나쳐지기도 합니다. 젠슨 황과 잡스의 사례가 흥미로운 만큼, 이 자산이 아무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쌓이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 두시면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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