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출처: Clarity UPSC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리스트가 있습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전 세계 173개 도시를 안정성, 의료, 문화와 환경, 교육, 인프라라는 다섯 개 잣대로 저울질해 내놓는 '세계 살기 좋은 도시' 순위인데요. 조사는 지난 5월, 각 지역 현지 전문가들의 평가와 세계은행·국제투명성기구 같은 외부 데이터를 함께 반영해 진행됐습니다.
30개가 넘는 세부 지표를 하나하나 채점한 뒤 100점 만점으로 환산하는 방식인데, 이게 은근히 냉정합니다. SNS에서 화제가 되는 야경이나 맛집 골목은 점수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거든요. 대신 구급차가 몇 분 만에 도착하는지, 정전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통근길 지하철이 제시간에 오는지가 점수를 가릅니다. 관광객이 몰리는 도시와 실제로 살기 편한 도시는 다르다는 걸, 이 리스트는 매년 조용히 증명해 온 셈입니다.
올해 결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왕좌를 2년째 지킨 도시가 있는가 하면, 한 해 사이 세 계단이나 내려간 도시도 있고, 작년까지 톱10에 이름을 올렸다가 올해는 명단에서 완전히 사라진 도시까지 나왔습니다. 순위표 열 줄 안에 이렇게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는 게, 사실 이 리스트를 매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미리보기
- 코펜하겐, 2년 연속 1위를 지킨 진짜 이유는 야경이 아니라 위기 대응력
- 3년 왕좌를 내준 빈,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 97.1점의 기초 체력
- 호주 도시 세 곳(멜버른·시드니·애들레이드)의 동반 상위권 진입
- 취리히·제네바, 스위스 두 도시가 나란히 밀린 이유
- 오사카는 그대로, 도쿄는 유일한 신규 진입
- 북미의 자존심 밴쿠버, 그리고 3계단 뛰어오른 뉴욕의 반전
- 톱10 밖 최대 이변, 중국 후저우 대 흔들리는 중동 도시들
- 최하위권과 2027년 전망까지

20년 넘게 같은 잣대를 고집하는 이유
이 지수를 오래 지켜본 사람이라면 눈치챘을 텐데요. EIU는 20년 넘게 거의 같은 방식으로 도시를 채점해 왔습니다. 담당자는 최근 인터뷰에서, 기후 변화나 신기술 도입 같은 최신 이슈를 반영하는 개선은 계속하되 핵심 평가 틀은 일부러 바꾸지 않는다고 밝혔는데요. 매년 기준이 바뀌면 도시 간 비교도, 한 도시의 연도별 변화도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이 순위는 '올해의 화제 도시'를 뽑는 자리가 아니라, 도시가 몇 년에 걸쳐 얼마나 꾸준히 좋아지거나 나빠졌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순위 하나하나보다 흐름을 읽는 게 더 흥미로운 지수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올해 173개 도시의 평균 점수는 76.1점으로 작년과 똑같았는데요. 안정성 점수는 평균 0.5점 떨어졌지만 의료 점수가 평균 0.7점 오르면서 서로를 상쇄한 결과입니다. 숫자 하나가 그대로 유지된 것 같아도, 그 안에서는 지역별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왕좌를 지킨 도시, 그러나 위태로웠던 한 해
1위는 다시 코펜하겐이었습니다. 2년 연속입니다. 안정성과 교육, 인프라 세 부문에서 만점을 받았고 종합 98점으로 자리를 지켰는데요. 흥미로운 건 이 왕관이 순탄하게 이어진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2024년 여름 대형 콘서트를 앞두고 폭탄 협박이 있었고, 지난해 초에는 기차역을 노린 테러 음모가 적발되기도 했습니다. 도시 하나가 감당하기엔 결코 가볍지 않은 사건들이었는데요.
그런데도 안정성 항목에서 만점을 받았다는 건, 위협이 벌어졌을 때 얼마나 빨리 통제하고 얼마나 빨리 일상으로 되돌리는지가 관건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코펜하겐은 사건 이후 후속 대응 속도와 시민 체감 안전도에서 오히려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EIU 측은 이번 코펜하겐의 1위를 두고 "어느 한 부문의 압도적 강점이 아니라 전 부문의 고른 일관성" 덕분이라고 설명했는데요. 위기가 아예 없는 도시가 아니라, 위기 이후를 잘 수습하는 도시가 결국 왕좌를 지킨다는 것. 자전거 도로와 운하 옆 산책로 같은 익숙한 풍경보다, 사실은 이런 회복력이 코펜하겐을 2년째 1위로 밀어 올린 진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3년 왕좌를 내주고도 웃을 수 있었던 도시
2위 빈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3년 연속 1위였던 도시가 코펜하겐에 밀려 2위로 내려앉은 지 벌써 2년째인데요. 97.1점이라는 점수는 여전히 압도적입니다. 1위와의 점수 차이가 1점이 채 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이건 사실상 공동 우승에 가까운 결과입니다.
순위표만 보면 아쉬운 결과 같지만, 빈의 진짜 경쟁력은 순위 변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초 체력에 있습니다. 오페라하우스와 미술관이 도시 중심가에만 몰려 있는 게 아니라 외곽 주거지까지 고르게 퍼져 있고, 병원 접근성도 지역별 편차가 크지 않습니다. 1위 자리를 두 해째 내줘도 2위 밑으로는 좀처럼 밀리지 않는 구조를, 빈은 오래전부터 만들어 둔 셈입니다.

오세아니아의 조용한 강세, 세 도시가 한꺼번에
3위 멜버른, 4위 시드니, 8위 애들레이드까지, 호주 도시 세 곳이 나란히 톱10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한 나라에서 세 도시가 동시에 상위권에 들어가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요. 멜버른은 문화와 환경 부문에서 유독 강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트램이 도심 곳곳을 촘촘히 잇고, 공원과 갤러리가 걸어서 닿을 거리에 있다는 게 이 도시의 강점으로 꼽힙니다. 시드니는 의료와 교육에서 만점에 가까운 평가를 받으며 한 계단 올라섰는데요. 하버브리지의 야경보다, 응급실 대기 시간과 공립학교 접근성이 순위를 갈랐다는 게 이 지수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애들레이드는 앞선 두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도시지만, 안정적인 공공서비스와 여유로운 생활 인프라 덕분에 꾸준히 상위권을 지키고 있습니다. 인구가 훨씬 적어 도시 관리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점도 한몫하는데요. 화려한 스카이라인보다 일상의 편의가 순위를 만든다는 걸, 호주의 세 도시가 나란히 증명하는 셈입니다.

작년 공동 2위, 올해는 5위로 미끄러진 이유
가장 눈에 띄는 하락은 취리히입니다. 지난해 빈과 공동 2위였던 도시가 올해는 5위로 세 계단이나 내려왔는데요. 원인은 문화와 환경 부문 점수 하락입니다. 안정성이나 인프라처럼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 지표가 아니라, 도시의 활기와 여가 인프라를 평가하는 항목에서 상대적으로 밀린 겁니다.
역설적인 건, 취리히가 뭔가를 크게 못해서가 아니라 다른 도시들이 그만큼 더 잘했기 때문에 순위가 밀렸다는 점입니다. 절대 점수는 여전히 최상위권인데, 상대적인 자리만 내준 셈이죠. 스위스답게 여전히 톱5 안이긴 하지만, 한 해 사이 세 계단이 빠졌다는 사실은 아무리 탄탄한 도시라도 방심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6위 제네바 역시 비슷한 이유로 한 계단 내려앉았는데, 두 스위스 도시가 나란히 밀린 걸 보면 이번 하락은 우연이 아니라 흐름에 가깝습니다.

순위를 지킨 도시와 처음 들어온 도시
7위 오사카는 지난해와 똑같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순위표에서 변화가 없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실력인데요. 다른 도시들이 오르내리는 와중에 제자리를 지킨다는 건, 약점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반면 10위 도쿄는 이번 톱10에서 유일한 신규 진입 도시입니다. 인구 천만이 넘는 초대형 도시가 이 순위에 오른 것 자체가 이례적인데요. 대부분 톱10은 인구 백만 안팎의 중소도시가 차지해 왔거든요. 문화와 환경 점수가 오르면서 세 계단을 뛰어올라 명단에 처음 이름을 올렸는데, 인구 밀도가 높으면 생활 인프라 점수가 낮아지기 마련이라는 통념을 도쿄가 깬 셈입니다.
두 도시가 나란히 톱10에 들어간 건 아시아 전체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아시아 도시들의 평균 점수가 전년보다 0.3점 올라 73.9점을 기록했고, 상위 20위 안에 아시아 도시가 아홉 곳이나 포함됐다는 발표도 있었습니다. 유럽 도시가 일곱 곳인 것과 비교하면, 저울추가 조금씩 아시아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북미의 자존심을 혼자 지킨 도시
9위 밴쿠버는 북미 대륙에서 유일하게 톱10에 든 도시입니다. 작년 10위에서 한 계단 올라선 결과인데요. 산과 바다를 동시에 낀 자연환경도 강점이지만, 결국 점수를 끌어올린 건 안정적인 공공 인프라였습니다.
미국 도시 중에서는 뉴욕이 가장 눈에 띄는 반전을 만들었습니다. 톱10 근처에도 못 갔지만, 66위로 3계단이나 뛰어오른 것 자체가 이번 발표의 화제였는데요. 범죄율이 꾸준히 낮아지고 테러 위험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면서, 안정성 항목에서 올해 가장 큰 폭의 점수 상승을 기록한 도시 중 하나로 꼽혔습니다.
미국 도시 중 순위가 가장 높은 곳은 여전히 호놀룰루로, 2계단 밀리긴 했지만 25위를 지켰습니다. 톱10 안에는 못 들어도, 도시가 스스로 위험 요인을 줄여나가면 순위표에서 확실히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걸 뉴욕이 보여준 셈입니다.

명단에서 조용히 사라진 도시
화려한 반전만큼 씁쓸한 퇴장도 있었습니다. 작년 7위였던 뉴질랜드 오클랜드는 올해 톱10 밖으로 완전히 밀려났습니다. 순위표 안에서 오르내리는 것과, 아예 명단에서 빠지는 건 체감 온도가 다릅니다. 어제까지 톱10 도시였던 곳에 살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도시가 갑자기 나빠진 것도 아닌데 다른 도시들이 더 빠르게 좋아지면서 밀려난 셈이니까요.
톱10 밖에서는 더 극적인 반전이 있었습니다. 중국 남동부의 산업도시 후저우는 의료 부문 점수가 오르면서 올해 순위 상승 폭 1위를 기록했습니다. 우시, 난징, 주하이 같은 다른 중국 도시들도 나란히 순위가 올랐는데, 사회보험 확대와 의료 인프라 투자가 맞물린 결과라는 분석입니다. 다만 정치적 제약이 여전히 문화·환경 점수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도 함께 나왔습니다. 반대로 중동 지역의 하락 폭은 유난히 컸습니다. 걸프 지역의 안정성 점수가 평균 1점 떨어지면서 오만 무스카트는 14계단, 쿠웨이트시티는 12계단이나 미끄러졌는데요. 전쟁과 지역 정세가 도시의 일상 편의도까지 흔들어 놓은 셈입니다.

최하위권과 내년 전망까지 들여다보면
톱10의 반대편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최하위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였습니다. 내전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도시인데요. 그 뒤를 리비아 트리폴리, 방글라데시 다카가 이었습니다. 이란 수도 테헤란은 올해 처음으로 최하위권 열 곳 안에 이름을 올렸는데, 지난 2월 시작된 전쟁의 여파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입니다. 반대로 지난 1월 정권 교체가 있었던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는 최하위권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도시가 됐습니다.
흥미로운 건 최하위권 도시들 사이에서도 '변화 없는 정체'와 '급격한 추락'이 뚜렷하게 갈렸다는 점입니다. 파키스탄 카라치는 2년째 170위에 그대로 머물렀고, 다카 역시 171위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은 채 바닥에 고정된 셈인데요. 반면 테헤란처럼 전쟁 하나로 순식간에 최하위권까지 떨어진 도시도 있었습니다. 결국 순위가 오르내리는 힘과, 아예 그 자리에 갇혀버리는 정체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보여줍니다.
EIU 담당자는 내년 전망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란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충격의 여파가 2027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고, 가계 부담이 커지면서 관광·문화 산업이 위축돼 문화 점수까지 끌어내릴 수 있다는 진단입니다. 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이 겹치면 대규모 인프라 투자 자체가 늦춰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나왔는데요. 결국 올해의 순위표는 끝이 아니라, 내년 순위표를 미리 그려보게 만드는 예고편에 가까운 셈입니다.
Editor's Note
순위표를 훑다 보면 자꾸 궁금해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왜 늘 유럽과 오세아니아 도시들이 상위권을 독식할까 하는 것인데요.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이 지수가 측정하는 건 '멋짐'이 아니라 '편안함'이기 때문입니다. 야경이 아름답거나 맛집이 많은 도시가 아니라, 대중교통이 제시간에 오고 병원 문턱이 낮고 학교가 가까운 도시가 점수를 받습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도쿄의 첫 진입과 오사카의 순위 유지, 푸저우를 비롯한 중국 도시들의 약진, 그리고 아시아 전체 평균 점수의 상승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화려한 랜드마크보다 촘촘한 생활 인프라 쪽으로, 아시아 도시들이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반대로 안정성 하나가 흔들리면 인프라나 문화 점수가 아무리 좋아도 순위가 크게 밀린다는 걸, 중동 도시들의 급락으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눈이 갔던 건 오클랜드의 조용한 퇴장이었습니다. 요란한 사건 하나 없이도, 다른 도시들이 조금씩 더 빨리 좋아지는 것만으로 순위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거든요. 결국 이 순위표가 말하는 건 '어디가 가장 화려한가'가 아니라 '어디가 계속 좋아지고 있는가'입니다. 다음 발표에서는 어느 아시아 도시가 새로 이름을 올릴지, 벌써 궁금해집니다.
출처
- Economist Intelligence Unit(EIU), 「Global Liveability Index 2026」, 2026.7.7
- CNN, 「The world's most livable city for 2026 has been revealed」
- 헤럴드경제, 「이코노미스트 '세계 가장 살기 좋은 도시' 톱10에 亞 2곳은 어디?」
- 아시아투데이, 「'2026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는 코펜하겐」
- Forbes, 「The Best Cities To Live In The World In 2026」
- ThePrint, 「Inside EIU's 2026 liveability rankings—China is climbing, Iran War sinks Gulf cities」
#엔엑스스퀘어 #엔엑스매거진 #라이프 #살기좋은도시 #코펜하겐 #세계도시순위 #EIU #이코노미스트인텔리전스유닛 #도시랭킹 #해외이주 #워홀추천도시 #여행지추천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리스트가 있습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전 세계 173개 도시를 안정성, 의료, 문화와 환경, 교육, 인프라라는 다섯 개 잣대로 저울질해 내놓는 '세계 살기 좋은 도시' 순위인데요. 조사는 지난 5월, 각 지역 현지 전문가들의 평가와 세계은행·국제투명성기구 같은 외부 데이터를 함께 반영해 진행됐습니다.
30개가 넘는 세부 지표를 하나하나 채점한 뒤 100점 만점으로 환산하는 방식인데, 이게 은근히 냉정합니다. SNS에서 화제가 되는 야경이나 맛집 골목은 점수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거든요. 대신 구급차가 몇 분 만에 도착하는지, 정전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통근길 지하철이 제시간에 오는지가 점수를 가릅니다. 관광객이 몰리는 도시와 실제로 살기 편한 도시는 다르다는 걸, 이 리스트는 매년 조용히 증명해 온 셈입니다.
올해 결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왕좌를 2년째 지킨 도시가 있는가 하면, 한 해 사이 세 계단이나 내려간 도시도 있고, 작년까지 톱10에 이름을 올렸다가 올해는 명단에서 완전히 사라진 도시까지 나왔습니다. 순위표 열 줄 안에 이렇게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는 게, 사실 이 리스트를 매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미리보기
20년 넘게 같은 잣대를 고집하는 이유
이 지수를 오래 지켜본 사람이라면 눈치챘을 텐데요. EIU는 20년 넘게 거의 같은 방식으로 도시를 채점해 왔습니다. 담당자는 최근 인터뷰에서, 기후 변화나 신기술 도입 같은 최신 이슈를 반영하는 개선은 계속하되 핵심 평가 틀은 일부러 바꾸지 않는다고 밝혔는데요. 매년 기준이 바뀌면 도시 간 비교도, 한 도시의 연도별 변화도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이 순위는 '올해의 화제 도시'를 뽑는 자리가 아니라, 도시가 몇 년에 걸쳐 얼마나 꾸준히 좋아지거나 나빠졌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순위 하나하나보다 흐름을 읽는 게 더 흥미로운 지수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올해 173개 도시의 평균 점수는 76.1점으로 작년과 똑같았는데요. 안정성 점수는 평균 0.5점 떨어졌지만 의료 점수가 평균 0.7점 오르면서 서로를 상쇄한 결과입니다. 숫자 하나가 그대로 유지된 것 같아도, 그 안에서는 지역별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왕좌를 지킨 도시, 그러나 위태로웠던 한 해
1위는 다시 코펜하겐이었습니다. 2년 연속입니다. 안정성과 교육, 인프라 세 부문에서 만점을 받았고 종합 98점으로 자리를 지켰는데요. 흥미로운 건 이 왕관이 순탄하게 이어진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2024년 여름 대형 콘서트를 앞두고 폭탄 협박이 있었고, 지난해 초에는 기차역을 노린 테러 음모가 적발되기도 했습니다. 도시 하나가 감당하기엔 결코 가볍지 않은 사건들이었는데요.
그런데도 안정성 항목에서 만점을 받았다는 건, 위협이 벌어졌을 때 얼마나 빨리 통제하고 얼마나 빨리 일상으로 되돌리는지가 관건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코펜하겐은 사건 이후 후속 대응 속도와 시민 체감 안전도에서 오히려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EIU 측은 이번 코펜하겐의 1위를 두고 "어느 한 부문의 압도적 강점이 아니라 전 부문의 고른 일관성" 덕분이라고 설명했는데요. 위기가 아예 없는 도시가 아니라, 위기 이후를 잘 수습하는 도시가 결국 왕좌를 지킨다는 것. 자전거 도로와 운하 옆 산책로 같은 익숙한 풍경보다, 사실은 이런 회복력이 코펜하겐을 2년째 1위로 밀어 올린 진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3년 왕좌를 내주고도 웃을 수 있었던 도시
2위 빈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3년 연속 1위였던 도시가 코펜하겐에 밀려 2위로 내려앉은 지 벌써 2년째인데요. 97.1점이라는 점수는 여전히 압도적입니다. 1위와의 점수 차이가 1점이 채 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이건 사실상 공동 우승에 가까운 결과입니다.
순위표만 보면 아쉬운 결과 같지만, 빈의 진짜 경쟁력은 순위 변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초 체력에 있습니다. 오페라하우스와 미술관이 도시 중심가에만 몰려 있는 게 아니라 외곽 주거지까지 고르게 퍼져 있고, 병원 접근성도 지역별 편차가 크지 않습니다. 1위 자리를 두 해째 내줘도 2위 밑으로는 좀처럼 밀리지 않는 구조를, 빈은 오래전부터 만들어 둔 셈입니다.
오세아니아의 조용한 강세, 세 도시가 한꺼번에
3위 멜버른, 4위 시드니, 8위 애들레이드까지, 호주 도시 세 곳이 나란히 톱10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한 나라에서 세 도시가 동시에 상위권에 들어가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요. 멜버른은 문화와 환경 부문에서 유독 강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트램이 도심 곳곳을 촘촘히 잇고, 공원과 갤러리가 걸어서 닿을 거리에 있다는 게 이 도시의 강점으로 꼽힙니다. 시드니는 의료와 교육에서 만점에 가까운 평가를 받으며 한 계단 올라섰는데요. 하버브리지의 야경보다, 응급실 대기 시간과 공립학교 접근성이 순위를 갈랐다는 게 이 지수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애들레이드는 앞선 두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도시지만, 안정적인 공공서비스와 여유로운 생활 인프라 덕분에 꾸준히 상위권을 지키고 있습니다. 인구가 훨씬 적어 도시 관리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점도 한몫하는데요. 화려한 스카이라인보다 일상의 편의가 순위를 만든다는 걸, 호주의 세 도시가 나란히 증명하는 셈입니다.
작년 공동 2위, 올해는 5위로 미끄러진 이유
가장 눈에 띄는 하락은 취리히입니다. 지난해 빈과 공동 2위였던 도시가 올해는 5위로 세 계단이나 내려왔는데요. 원인은 문화와 환경 부문 점수 하락입니다. 안정성이나 인프라처럼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 지표가 아니라, 도시의 활기와 여가 인프라를 평가하는 항목에서 상대적으로 밀린 겁니다.
역설적인 건, 취리히가 뭔가를 크게 못해서가 아니라 다른 도시들이 그만큼 더 잘했기 때문에 순위가 밀렸다는 점입니다. 절대 점수는 여전히 최상위권인데, 상대적인 자리만 내준 셈이죠. 스위스답게 여전히 톱5 안이긴 하지만, 한 해 사이 세 계단이 빠졌다는 사실은 아무리 탄탄한 도시라도 방심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6위 제네바 역시 비슷한 이유로 한 계단 내려앉았는데, 두 스위스 도시가 나란히 밀린 걸 보면 이번 하락은 우연이 아니라 흐름에 가깝습니다.
순위를 지킨 도시와 처음 들어온 도시
7위 오사카는 지난해와 똑같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순위표에서 변화가 없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실력인데요. 다른 도시들이 오르내리는 와중에 제자리를 지킨다는 건, 약점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반면 10위 도쿄는 이번 톱10에서 유일한 신규 진입 도시입니다. 인구 천만이 넘는 초대형 도시가 이 순위에 오른 것 자체가 이례적인데요. 대부분 톱10은 인구 백만 안팎의 중소도시가 차지해 왔거든요. 문화와 환경 점수가 오르면서 세 계단을 뛰어올라 명단에 처음 이름을 올렸는데, 인구 밀도가 높으면 생활 인프라 점수가 낮아지기 마련이라는 통념을 도쿄가 깬 셈입니다.
두 도시가 나란히 톱10에 들어간 건 아시아 전체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아시아 도시들의 평균 점수가 전년보다 0.3점 올라 73.9점을 기록했고, 상위 20위 안에 아시아 도시가 아홉 곳이나 포함됐다는 발표도 있었습니다. 유럽 도시가 일곱 곳인 것과 비교하면, 저울추가 조금씩 아시아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북미의 자존심을 혼자 지킨 도시
9위 밴쿠버는 북미 대륙에서 유일하게 톱10에 든 도시입니다. 작년 10위에서 한 계단 올라선 결과인데요. 산과 바다를 동시에 낀 자연환경도 강점이지만, 결국 점수를 끌어올린 건 안정적인 공공 인프라였습니다.
미국 도시 중에서는 뉴욕이 가장 눈에 띄는 반전을 만들었습니다. 톱10 근처에도 못 갔지만, 66위로 3계단이나 뛰어오른 것 자체가 이번 발표의 화제였는데요. 범죄율이 꾸준히 낮아지고 테러 위험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면서, 안정성 항목에서 올해 가장 큰 폭의 점수 상승을 기록한 도시 중 하나로 꼽혔습니다.
미국 도시 중 순위가 가장 높은 곳은 여전히 호놀룰루로, 2계단 밀리긴 했지만 25위를 지켰습니다. 톱10 안에는 못 들어도, 도시가 스스로 위험 요인을 줄여나가면 순위표에서 확실히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걸 뉴욕이 보여준 셈입니다.
명단에서 조용히 사라진 도시
화려한 반전만큼 씁쓸한 퇴장도 있었습니다. 작년 7위였던 뉴질랜드 오클랜드는 올해 톱10 밖으로 완전히 밀려났습니다. 순위표 안에서 오르내리는 것과, 아예 명단에서 빠지는 건 체감 온도가 다릅니다. 어제까지 톱10 도시였던 곳에 살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도시가 갑자기 나빠진 것도 아닌데 다른 도시들이 더 빠르게 좋아지면서 밀려난 셈이니까요.
톱10 밖에서는 더 극적인 반전이 있었습니다. 중국 남동부의 산업도시 후저우는 의료 부문 점수가 오르면서 올해 순위 상승 폭 1위를 기록했습니다. 우시, 난징, 주하이 같은 다른 중국 도시들도 나란히 순위가 올랐는데, 사회보험 확대와 의료 인프라 투자가 맞물린 결과라는 분석입니다. 다만 정치적 제약이 여전히 문화·환경 점수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도 함께 나왔습니다. 반대로 중동 지역의 하락 폭은 유난히 컸습니다. 걸프 지역의 안정성 점수가 평균 1점 떨어지면서 오만 무스카트는 14계단, 쿠웨이트시티는 12계단이나 미끄러졌는데요. 전쟁과 지역 정세가 도시의 일상 편의도까지 흔들어 놓은 셈입니다.
최하위권과 내년 전망까지 들여다보면
톱10의 반대편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최하위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였습니다. 내전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도시인데요. 그 뒤를 리비아 트리폴리, 방글라데시 다카가 이었습니다. 이란 수도 테헤란은 올해 처음으로 최하위권 열 곳 안에 이름을 올렸는데, 지난 2월 시작된 전쟁의 여파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입니다. 반대로 지난 1월 정권 교체가 있었던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는 최하위권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도시가 됐습니다.
흥미로운 건 최하위권 도시들 사이에서도 '변화 없는 정체'와 '급격한 추락'이 뚜렷하게 갈렸다는 점입니다. 파키스탄 카라치는 2년째 170위에 그대로 머물렀고, 다카 역시 171위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은 채 바닥에 고정된 셈인데요. 반면 테헤란처럼 전쟁 하나로 순식간에 최하위권까지 떨어진 도시도 있었습니다. 결국 순위가 오르내리는 힘과, 아예 그 자리에 갇혀버리는 정체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보여줍니다.
EIU 담당자는 내년 전망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란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충격의 여파가 2027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고, 가계 부담이 커지면서 관광·문화 산업이 위축돼 문화 점수까지 끌어내릴 수 있다는 진단입니다. 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이 겹치면 대규모 인프라 투자 자체가 늦춰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나왔는데요. 결국 올해의 순위표는 끝이 아니라, 내년 순위표를 미리 그려보게 만드는 예고편에 가까운 셈입니다.
Editor's Note
순위표를 훑다 보면 자꾸 궁금해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왜 늘 유럽과 오세아니아 도시들이 상위권을 독식할까 하는 것인데요.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이 지수가 측정하는 건 '멋짐'이 아니라 '편안함'이기 때문입니다. 야경이 아름답거나 맛집이 많은 도시가 아니라, 대중교통이 제시간에 오고 병원 문턱이 낮고 학교가 가까운 도시가 점수를 받습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도쿄의 첫 진입과 오사카의 순위 유지, 푸저우를 비롯한 중국 도시들의 약진, 그리고 아시아 전체 평균 점수의 상승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화려한 랜드마크보다 촘촘한 생활 인프라 쪽으로, 아시아 도시들이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반대로 안정성 하나가 흔들리면 인프라나 문화 점수가 아무리 좋아도 순위가 크게 밀린다는 걸, 중동 도시들의 급락으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눈이 갔던 건 오클랜드의 조용한 퇴장이었습니다. 요란한 사건 하나 없이도, 다른 도시들이 조금씩 더 빨리 좋아지는 것만으로 순위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거든요. 결국 이 순위표가 말하는 건 '어디가 가장 화려한가'가 아니라 '어디가 계속 좋아지고 있는가'입니다. 다음 발표에서는 어느 아시아 도시가 새로 이름을 올릴지, 벌써 궁금해집니다.
출처
#엔엑스스퀘어 #엔엑스매거진 #라이프 #살기좋은도시 #코펜하겐 #세계도시순위 #EIU #이코노미스트인텔리전스유닛 #도시랭킹 #해외이주 #워홀추천도시 #여행지추천